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제너 (문단 편집) == 생애 == 글로스터셔 주 버클리 출생. 13세 때부터 의학을 공부했으며, 1770년에 존 헌터(1728년 ~ 1793년)로부터 2년간 외과학을 배우고, 그들의 우정은 헌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인트조지 병원에 근무하다 1773년에 고향 마을에서 개업의가 되었는데, 이 지방에서는 [[우유]] 짜는 부인이 [[소]]의 우두를 경험한 뒤에는 사람이 앓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우두란 소나 사람이 걸리는 천연두와 비슷한 질병인데, 천연두에 비해 특별한 치료가 없어도 대부분 자연 치유가 되고 증상 및 후유증도 심하지 않는 편이었다.[* 우유를 짜는 여성의 손에 종기가 생기긴 하지만 이로 인해 죽거나 병을 앓지는 않았다. 또한 손에 생기는 종기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치료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enner_phipps_01.jpg]] 제너는 이러한 사실을 의학에 응용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한 인체 실험이 필요했는데 존 필립이라는 당시 62세의 노인이 9세 때 우두를 앓았다고 실험에 자청하였다. 제너는 천연두의 병균을 노인에게 접종한다. 결과는 접종 부위에 약간의 발진이 발생했지만 5일 후 회복되었다. 한 번 우두에 걸리고 나면 50년이 지나도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그 후 1796년 우두농을 8세 소년 제임스 핍스(James Phipps, 1788년 ~ 1853년)의 팔에 접종하고 6주 후 천연두농을 소년에게 접종하였으나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cow_pock.jpg|width=600]] 제너의 진가가 인정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는데, 제너의 실험 결과가 인정받기까지는 종두법에 대해 편견이 상당했다. 우두법 개발 초기에는 "소 고름을 맞으면 사람이 소로 변한다"는 헛소문이 돌기도 했다.일례로 당시 신문 삽화에는 우두법을 처방받은 사람의 몸에서 소가 튀어나온다거나 소처럼 변하고 소를 숭배하는 모습으로 그린 경우도 있었다.[* 저 그림을 그린 작자는 의외로 영국의 사회비평가이자 화가인 제임스 길레이(James Gillray, 1756~1815)다. 사회 풍자화나 만평을 많이 그렸던 화가로 유명하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b/b4/Hand-Writing-upon-the-Wall-Gillray.jpeg/800px-Hand-Writing-upon-the-Wall-Gillray.jpeg|일례]]로 [[나폴레옹]] 정부를 비판하는 만평을 그리기도 했다.] 지금이야 저런 것을 무지하다고 보지만 당시에는 그럴 만도 한 것이, 저 때는 종두법 자체가 검증되기 전이었는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같은 의사들이나 과학계 사람들도 "제너가 검증되지도 않은 방법을 사람을 상대로 쓴다!"라고 비판하며 한 마음으로 깠다고 한다. 구한말~일제강점기 당시 지석영에 의해 우두법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일본놈들이 소 고름을 사람에게 놔서 순하고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려 한다더라"라는 유언비어가 돈 적이 있다. 그는 1798년까지 23번의 실험을 실시하여 그 결과를 [[왕립학회]]에 보고했다. 실험 대상자 중에는 11개월 된 자신의 아들도 포함돼 있다. 영국 왕립 학회는 결과를 보고 우두법의 효능을 인정했으나, 그 대신에 우두법을 특허로 낼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그러나 제너는 돈이 아닌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조너스 소크|끝까지 거절하고 우두법을 다른 의사들이 무료로 처방할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하여 왕립 학회에게 무시당했지만 대신 세계 곳곳의 학회로부터 명예 회원으로 존경받으며 우대받았다. 그가 천연두 백신을 무료로 풀었음에도 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개인 병원 운영과 세계 각국의 연구비와 기부금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과학 의료 아카데미 회원, 스웨덴 왕립 학회 회원, 독일 의학 협회 회원 등. 그리고 제너의 무상 봉사는 그만큼 대우를 받아 세계 곳곳에서 거액의 기부금을 받았으며 여러 유럽 나라에서 깍듯이 우대를 받고 위대한 의학자로도 존중받았다. 이후 1805년에는 우두법의 효능을 알아본 [[나폴레옹]]이 자신의 군대에 우두 접종을 실시하기에[* 이 때 우두법의 보급을 지원하고 진행한 인물로 기요탱 박사가 있다. [[단두대]]의 어원이 된 그 사람 맞다. 기요탱은 본래 의사 출신으로 우두법의 보급과 같은 보건-의료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르렀는데 이는 군대 내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률을 크게 낮추는 역할을 하였고, 결국 그의 유럽 대륙 정복에 일정 부분 도움을 주었다. 아미앵 조약 이후로는 영국 포로를 절대 석방하지 않던 나폴레옹이 제너가 포로 석방을 부탁하자 '인류의 은인의 부탁을 거절할수는 없다.' 라며 부탁한 포로들을 [* 그중에는 스파이도 있었다!!] 석방해서 보내줬다고. 이러다 보니 영국 왕립 학회도 백기를 들고 제너를 받아주면서 영국의 자랑이라고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천수를 누리던 그는 1823년 만 73세 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제너는 종두법이 의학계에서 검증된 후에 부자가 되자 이전에 살던 집을 맨 먼저 접종을 받았던 소년인 핍스에게 주었다. 정확히는 핍스의 가족에게 무료 임대를 준 것이다. 그 후 그의 후손이 영국 국교회에 매각하여 현재는 제너를 기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